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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사망 되돌아 보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by 카부자 2021. 11. 27.

뉴욕타임즈 기사 제목인 전 군부 독재자 90세 일기로 숨져 타이틀과 전두환 수감자복 오버랩된 이미지
전두환

전두환 사망이 이슈의 키워드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입니다. 전두환은 사과 없이 떠났고, 발인 직전 배우자인 이순자 씨가 최초 사과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제대로 몰랐다면 진짜 사실을 확인하세요. 

 

 

 

5.18 민주화운동 무력진압

1979년 대한민국은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최측근 김재규에 의해 피살. 혼란한 상황에서 전두환이 나서게 됩니다.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 및 독재정치로 이골이 나있던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강하게 피어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유, 민주화였습니다. 

 

충정작전 그리고 군사쿠데타 시작

전두환 군사쿠테타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미 본인도 알고 있었습니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충정작전'이라는 훈련을 준비했습니다. 훈련의 목적은 효과적인 시위 (무력) 진압.

 

5.17 군사쿠데타 시작

  • 비상계엄 확대
  • 민주화 인사 일제히 체포
  • 국회해산
  • 야당 3인(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감금

전두환은 계획한 대로 국회를 해산하고 예비검속이라는 이유로 민주화 세력을 한 번에 잡아들이거나 수배 조치를 합니다. 민주화를 이끌던 정치세력을 잡으면 쿠데타는 마무리될 것이라고 생각한 전두환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세력이 쉽게 진압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또 다른 시작 

  • 휴교령 반대하는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
  • 계엄군의 시위 학생 폭행
  • 학생 폭행을 말리는 시민을 폭행
  • 시민이 시위에 합류
  • 총에 대검 장착한 특수부대 투입
  • 시위 진압

처음 전남대 학생들의 시작은 일반적인 시위였습니다. 하지만 계엄군의 진압은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을 시도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훈련을 지시한 사람은 전두환. 비상식적인 진압에 광주 시민들이 학생들을 보호하거나 계엄군에게 항의합니다. 시민도 진압 대상이 되어 다시 무력 진압. 시민들로 이제 시위에 참여하게 되면서 일반적인 시위에서 시작된 작은 불씨가 커지게 됩니다.

 

5.19 광주 시민들의 분노

 첫 사상자의 소식이 광주에 순식간에 퍼져나갑니다. 청각장애인이었던 김경철. 공수부대원이 말을 하지 않자 당시 24살이던 김경철 씨가 농아 신분증을 꺼내 살려달라고 했지만 무차별 폭행으로 5월 18일 사망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5월 19일 광주시민 약 4천여 명은 집결합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

 

 시위가 확대되면서 총과 대검이 등장합니다. 광주 시민들의 커져가는 시위 규모를 보고 받은 전두환의 결정은 북한 침투작전을 위해 훈련된 공수부대를 투입. 대검과 실탄까지 제공합니다. 학생 김영찬 총상, 노동자 김안부 총기 사망. 

 

 

 

5.20 우리를 죽여라

 계엄군에 이어 대검과 총기 발포를 하는 공수부대에 사망자가 늘어나자 시민들도 이제는 시위가 아닌 시위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차라리 우리를 죽이라며 움츠려들지 않고 오히려 더 맞서게 된 것입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은 엄폐물로 시위하는 시민들이 진격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운전사들이 시위에 동참하면서 차량(버스, 택시 등)을 엄폐물로 활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계엄군은 집단발포를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대상은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이었습니다. 

 

5.21 무장하는 시위대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무장하지 않은 상태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자행한 집단발포 이후에도 바로 무기를 들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의 사상자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에게 아니 전두환에게 타협을 제안했습니다. 시민 대표가 도지사를 대면하여 요구사항을 전달하였던 것입니다.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헬기까지 동원한 집단 발포였습니다. 공중에서 헬기로 시민들이 있는 건물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한 것입니다. 그 흔적은 당시 건물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결국 21일 15시 무장한 시민군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승리합니다. 계엄군이 후퇴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립되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시민들은 폭도가 아니였습니다. 스스로 총기를 회수하며 시민공동체를 스스로 만들어 질서를 정립하고자 했습니다. 

 

5.27 상무 충정작전

이것이 광주 민주화운동의 끝이 아닙니다. 전두환은 결국 광주를 진압합니다. 어떻게 진압했을까요? 27일 새벽 M47 탱크 대대가 앞장서고 전투병력 2만 6585면의 병력이 뒤를 따랐습니다. 자국민에게 행한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시민군은 전남도청에서 모두 집압이 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전두환 사망 날짜 2021년 11월 23일. 장례기간 동안 유족들에게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질문에 묵묵부답. 전 씨 발인 직전 5.18 언급 없이 형식적인 사과 의사만 내비쳤습니다.

 

최측근 민정기(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씨는 그가 떠난 뒤에도 전두환의 발포명령은 없었다고 다시 강조했습니다. 전 씨 업적에 대해 지지하는 사람들은 2021년에도 5.18 민주화 운동은 북한군의 소행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 공화당은 '전두환 대통령님 편히 영면하십시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뉴욕타임스도 전두환 사망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전 군부 독재자 90세 나이로 숨져"라는 제목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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